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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인터뷰는 짧은 진료시간 동안 미처 나누지 못하는 환우들의 현실적 삶과 개인적 고민을 회원들께 들려드리기 위해 마련했습니다. 실제 뇌전증을 앓고 있는 최상원 대표(환우회 ‘따뜻한 사람들의 모임’, 따사모)와 뇌전증 자녀를 둔 허도경 대표(소아 뇌전증 환우 부모회)의 뇌전증 관련 고충을 가감 없이 들어보고, 치료적 성과 외 뇌전증 환우의 사회적/경제적/정신적 고통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하는 회원들께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랍니다.

'따뜻한 사람들의 모임' - 최상원 대표 인터뷰

뇌전증(Epilepsy, 과거 ‘간질’)의 어원이 ‘외부의 악령에 의해 영혼이 사로잡히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만큼 이 단어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환우들에게 큰 상처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용어의 잔존을 없애기 위해 종교, 정치, 사회 전반에 걸친 인식과 정책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뇌전증 환우 모임 커뮤니티 <따뜻한 사람들의 모임> 운영자 최상원 대표를 만났습니다.

하루 아침에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 질환, 뇌전증

“상원아, 이 놈아 내가 평소에 그렇게 무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 아이고 어떻게 하면 좋으냐?”

2005년 9월, 여느 평범한 날처럼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던 도중 갑자기 말문이 턱 막히고,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함을 호소하던 최상원 대표는 그대로 기억을 잃었습니다.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어 다시 눈을 떴을 때 깨어난 그를 붙잡고 가장 친한 친구는 울부짖었습니다. 가족들도 모두 눈물을 훔치며 병상에 누워있는 최상원 대표를 바라보았습니다.

뇌 손상에 따른 중추 신경 장애로 인해 말 하는 것은 물론 보행도 불편해졌습니다. 전조 증상이라고는 첫 발작을 일으키기 고작 보름 전, 가슴이 조금 답답하다는 느낌이 전부였던 최상원 대표에게 닥친 상황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병원을 오가며 약을 지속적으로 복용했지만, 발작을 일으켜 쓰러지면 2분~4분 정도 시간이 지나 깨어나는 빈도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5년여의 시간이 지나 최상원 대표는 ‘뇌전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의 나이는 이제 고작 40대 초반이었습니다.

“절망적이었죠. 뇌수술을 받고 재활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했지만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것에 회의가 왔다고 할까요. 운영하던 출판사와 학원도 정리하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짐이 되는 것 같아 이혼 후 어머니와 동생이 있는 강릉으로 내려왔죠.”

우울과 절망 속에서 그를 꺼내 준 것은 같은 아픔을 지닌 환우회

하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걸 정리하고 내려온 아들을 돌보던 어머니는 충격으로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와 가족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 뇌전증 앞에서 속수무책이던 그에게 우울증까지 찾아왔습니다.

“5년 정도 우울증 약을 복용하면서 병원 치료를 받았지만, 큰 호전이 없었죠. 인생의 낙오자가 된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그렇게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최상원 대표는 어느 날 ‘뇌전증’에 대해 검색을 하다 우연히 온라인 카페<따뜻한 사람들의 모임>를 알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지금까지 괜찮다가 어제 갑자기 발작한 이후 주변에서 안 좋은 소리 듣고 너무 힘드네요. 내용도 부분만 기억날 뿐 정확한 건 기억이 안 납니다. 치료도 잘 받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마음이 너무 아프고 힘듭니다.”

“뇌전증 약 먹고 산지도 어언 20년인데 사실 부작용이 많다 보니 뇌전증 하나 잡으려다 몸이 더 안좋아 진 것 같아요. 의사들은 맨날 약 먹으라는 소리만 하지 별 위안은 안되네요. 이렇게 평생 살아야 하나 죽을 지경입니다.”

자신과 같은 질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다는 사실에 곧바로 가입을 하고 큰 용기를 내어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20명 정도 모인 자리에서 제 소개를 했죠. 같은 아픔을 갖고 있어서인지 저를 따뜻하게 환대해줬어요. 그 때부터 꾸준히 매달 모임을 나갔고, 점차 긍정적인 성격을 되찾아 갔죠. 그렇게 활동하다 2012년부터 총 회의를 거쳐 카페 대표가 되었고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뇌전증’으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주위 곳곳에 잔존하며 상처를 주고 있는 ‘간질’

절망 속에 갇혀 있던 그에게 환우들이 힘을 주었던 것처럼 최상원 대표는 환우들의 가장 큰 고민과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성경을 편찬하는 위원회에 한 통의 메일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성경 구절에 게시되어 있는 ‘간질’이라는 명칭의 변경을 요청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제목 : 성경에서 불편한 부분에 대한 의견입니다.

간질…
지금은 뇌전증이라는 용어로 변경되었지만 아직도 간질이라고 쓰이는 있는 정확한 병명은 뇌전증입니다.

물론 간질 자체가 잘못된 용어는 아닙니다만, 간질이라는 용어가 주는 사회적 편견이 심하기 때문에 지금은 뇌전증이라는 용어로 변경되었습니다.

지금까지 10년이란 시간을 뇌전증과 함께 하면서 저는 간질이란 낙인이 우리 아픈 사람들의 삶 속에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답답한지 제 마음을 소명하고자 합니다.

성경책에 “심히 경련을 일으키며 땅에 구르며 거품을 흘린다.”는 말씀처럼 간질은 각종 귀신 들린 현상과 쫓을 때의 현상을 뜻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 구절에서도 ‘이 병의 원인 중의 하나로 귀신을 들고 있다.’ ‘예수님은 이런 간질병 환자들을 고쳐 주셨다.’ 고 나와 있는 것처럼 이러한 성경 말씀은 아직도 전국에 수 많은 뇌전증 환우들의 마음에 큰 상처만 남겨주고 있습니다.

이에 성경 원문에 ‘간질’을 ‘뇌전증’으로 개명, 변경해주시길 성경을 감수하는 편찬위원님들에게 간곡히 청원 드립니다.

-최상원 집사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간질’이라는 단어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뇌전증이라고 명칭이 바뀐지 오래 되었지만, 여전히 ‘간질’이라는 단어는 우리 주변 곳곳에 남아 환우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어요. 종교에서조차 이러한 표현을 아직 쓰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뇌전증 학회에서도 이름만 바꿨을 뿐 실질적인 큰 개선은 없는 것 같아서 아쉽고요.”

돌아오는 답변은 늘 ‘노력하고 있다.’ ‘곧 바뀔 수 있도록 검토하겠다.’뿐이지만, 그는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계속되면 조금이라도 개선되는 것이 앞당겨 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단 하나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해도 크게 소용 없고 바뀌지 않을 것을 알고 있어요. 학회에서도 교회에서도 늘 ‘곧’이라고 말하면서 여전히 제 자리지만, 이런 의견이 계속 되어야 서서히라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요?”

낙인 찍혀 숨어 지내야만하는 뇌전증 환자들의 현실 의료계뿐만 아니라 정치계의 따뜻한 관심과 정책 마련이 시급

간질이라는 용어를 없애는 것과 함께 최상원 대표가 주력하고 있는 또 한가지는 바로 뇌전증 환자의 사회적 참여에 대한 인식과 제도적 마련입니다.

“뇌전증 환자가 전국에 약 50만명 정도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절반 정도는 대부분 질병을 감추고 숨어 지냅니다. 언제 어디서 경련이 일어날지 몰라 사회 활동조차 시도하지 못하고, 은둔 생활을 하며 살아가죠. 기업에서도 채용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고요. 하지만 의사와 충분한 상담을 통해 약을 정확히 잘 복용하고, 만일 경련이 일어났을 때 조치 사항만 잘 숙지하고 있다면 사회 생활을 하는 것에 큰 무리가 없습니다.”

그는 의료진들이 학회나 언론을 통해 뇌전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많이 좋아졌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일침을 가했습니다.

“의사들이 환자를 진료하는 시간이 고작 3분에서 5분 이내인데, 과연 뇌전증 환자들의 고충을 잘 이해할까요? 환우들이 지금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지, 어떤 상황인지 조금만 관심을 가져 준다면 마치 큰 죄를 지은 낙인처럼 숨어 지내는 사람들이 크게 줄어들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약만 주는데 그치죠. 병원 입장에서는 돈 안되는 환자들이 바로 저희니까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에 하늘이 원망스럽고 차라리 죽고 싶다.’는 한 환우의 글처럼 질환으로 인한 삶의 질 저하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 밖에 없는 이 현실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서서히’ 움직이고 있는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얼마 전 뇌전증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시스템을 구축하고, 뇌전증 환자의 재활과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법률안이 발의되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 뇌전증 환자 3명 중 1명이 심각한 우울증과 불안증을 겪고 있고, 환자의 가족 약 200만 명은 심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다는 현실도 공유가 됐죠. 국가적 차원의 지원과 관리가 미비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뇌전증 환자들의 재활과 자립을 돕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모든 것을 섣불리 낙관하기에는 이르지만, 이러한 정치적 움직임이 의학계와 종교계를 넘어 사회 전반에 걸쳐 뇌전증 환자들에게 희망의 불씨가 될 것이라 기대되는 대목입니다.

뇌전증 환자들이 당당히 사회 구성원으로 참여하며 삶의 희망을 찾는 날까지

마지막으로 최상원 대표는 한 가지 꿈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뇌전증 진단을 받고 나서 언어 표현과 거동이 매우 불편해졌지만, 틈틈이 운동과 발성 연습을 하면서 85%정도 회복했습니다. 건강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고, 글을 쓰면서 전에 운영하던 출판사 일을 돕고 있는데, 언젠가 우리 환우들과 함께 공동 사업장을 운영해 보고 싶습니다.

뇌전증의 굴레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벗어나 사회의 한 일원으로써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고, 그 과정에서 임금도 받으며 성취감을 얻는 삶을 경험하도록 하고 싶어요.
일반인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우리 환우들에게는 꿈과 같은 일이지만, 이런 뜻을 갖고 계속 나아가다 보면, 이 꿈과 같은 일을 언젠가는 현실에 조금 더 가까워져 있지 않을까요?”

그의 바람대로 뇌전증 환자들이 당당히 사회에 나와 절망이 아닌 희망으로 자신들의 삶을 일궈나갈 수 있도록 정치, 의료, 사회 전반의 고민과 개선이 하루빨리 이뤄져 나가길 바랍니다.

*뇌전증학회에 바랍니다*
01 간질이라는 단어를 뇌전증으로 완전하게 교체하는 의학계와 종교, 정책적인 지원 필요
02 뇌전증 환자들이 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인식 개선을 위한 의료진의 적극적 지원과 노력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