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과 문화

뇌전증의 발작시 임상양상(ictal semiology):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화적 해석
- 유수연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현대는 과학의 시대다. 산업 혁명 이후 급속하게 발달한 과학 기술은 사회 전반의 발전적 변화를 이끌었으며, 그 수혜를 가장 크게 받은 영역 중의 하나가 의학일 것이다. 의학 안에서도 신경과, 특히 뇌전증(Epilepsy) 분야는 과학 기술의 발전에 의해 그 진단과 치료에 많은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다.

뇌전증은 고대부터 관찰되었고, 환자와 그 현상을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공포를 갖도록 하는 신비한 질환이었다. 수많은 구전, 문헌, 그리고 다양한 예술 작품 속에 뇌전증을 묘사하는 기술과 묘사들이 녹아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뇌파를 측정하는 기술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이 질환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무지한 상태를 해결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기에, 뇌전증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들을 고민했으며, 가장 그럴 듯한 병리 기전으로 생각한 것 중에 하나가 ‘신’에 의해 발생한 현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뇌전증의 영어 명칭인 ‘Epilepsy’의 기원도, ‘사로잡히다’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인 ‘Epilambanein(ἐπιλαμβάνειν)’이며, 신성한 병(sacred disease)으로 생각되었다.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히포크라테스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뇌전증 환자의 증상에 따라 각각 다른 신이 일으켰다고 여겨졌다. 히포크라테스 전집에 나온 내용들을 살펴보면, ‘이를 갈면서 오른쪽 팔다리를 떠는’ 발작(seizure)은 ‘키벨레(Cybele, Κυβέλη)’ 여신에 의해 발생한 것이고, ‘말처럼 비명을 지르는’ 발작은 ‘포세이돈(Poseidon, Ποσειδῶν)’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비교적 명확한 발작시 임상양상에 대한 기술로 인해, 현대 신경과 의사의 관점으로 보면 위의 증상들은 뇌전증파가 시작되는 부위의 국소화(localization)가 가능하다. 키벨레 여신에 의한 발작은, 이를 가는 자동증(automatism)이 있다가 오른쪽의 간대 운동 (clonic movement)가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보아 좌측 측두엽 뇌전증(temporal lobe epilepsy, TLE)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포세이돈 신이 일으킨다는, 말처럼 소리지르는 발작은, 크게 소리지르는 증상(vocalization)이 나타나는 전두엽 뇌전증(frontal lobe epilepsy, FLE)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말처럼’ 소리지른다는 표현을 볼 때, 크게 소리지르면서 말이 달리듯 팔다리를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을 거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고, 그러한 임상양상은 전두엽 뇌전증의 증상과 매우 흡사하다.

왜 각각의 뇌전증 증상에 키벨레와 포세이돈이란 신을 원인으로 연결했는지를 추론해보기 위해서는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키벨레는 소아시아 지방에서 숭배되던 대지모신(大地母神)이 그리스 신화 속으로 편입된 것이라고 하며, 제우스의 딸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또는 반대로 제우스의 어머니인 ‘레아’ 여신의 다른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 신은 로마 시대까지도 많이 숭배되던 존재로, 그리스 신화 속의 모습을 살펴보면 ‘불경에 대한 엄격함’과 ‘광기를 일으키거나 치료하는 능력’이 나타나 있다. 불경함에 대한 엄격함은 ‘아탈란테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데, 아르카디아의 공주인 아탈란테는 그녀의 남편과 키벨레 여신의 신전에서 성행위를 나누는 바람에 벌을 받아 한 쌍의 사자가 되어 영원히 여신의 마차를 끌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리스신화 속 대부분의 신들이 자신의 신전을 더럽히거나 모욕하는 인간에게 무거운 벌을 내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한 나라의 공주였던 여성이 짐승으로 변해 영원히 마차를 끄는 노역을 하는 것은 키벨레 여신의 엄격함을 강조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림: 스페인 마드리드 광장에 위치한 키벨레 분수,
신화 속의 모습대로 두 마리의 사자가 끄는 마차를 타고 있다.)

키벨레 여신과 광기와의 연관성은 그녀가 제우스의 딸로 묘사되는 신화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키벨레 여신의 기원에 대한 신화에서 그녀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Zeus, Ζεύς)의 정액에서 탄생했다고 하며, 처음 태어난 순간에는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신들에 의해 남성기는 잘려 강에 버려졌는데, 거기에서 '아티스'라는 남성이 태어나게 된다. 키벨레의 신체 일부에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아티스는 그녀의 아들로도 볼 수 있는데, 그녀는 아티스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티스가 한 눈을 팔지 못하게 하기 위해(혹은 그가 다른 여자에게 한 눈을 팔아서), 그의 정신에 광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그 광기로 인해 아티스는 자신의 성기를 돌로 찧어서 자해한 후 사망하게 된다. 키벨레 여신은 이와 같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무서운 광기를 불어넣을 수도 있으나, 반대로 광기를 치유하는 힘을 보여주는 이야기도 있다.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가 헤라의 저주로 미쳐서 온 그리스 땅을 헤매다가 키벨레의 신전에 도착하였을 때, 그녀의 권능으로 광기가 사라졌다고 하며, 이러한 신화들을 볼 때 그녀가 광기를 자유롭게 다루는 존재라는 믿음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위의 신화들과 키벨레 여신에 의해 일어났다고 믿어진 발작 간의 연관성을 설명해보자면, 좌측 측두엽 뇌전증은 정신분열양 정신증(schizophrenia-like psychoses of epilepsy)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으며, 정신분열양 정신증과 함께 나타나는 우측의 간대 운동은 좌측 측두엽 뇌전증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에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이를 갈고 오른쪽 팔을 떠는 발작이 정신병적 증상과 함께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고, 이 병이 광기를 다스리며, 불경한 자에게 엄격한 여신인 키벨레가 만든 것 혹은 그녀가 내린 벌이라고 상상했을 가능성을 고려해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포세이돈은 어떤 이유로 ‘말처럼 소리를 지르는 발작’과 연관이 되었을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세이돈이 그리스 신화 속의 대표적인 12주신(主神) 중의 하나이며, 삼지창을 들고 바다를 다스리는 신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다의 신이라는 개념만을 생각하면 특별히 뇌전증과 같은 질병과 연관될 여지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를 좀 더 살펴보면, 포세이돈은 ‘말의 신’이라는 별칭이 붙어도 될 만큼 말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다.


(그림: Walter Crane의 1910년 작품인 ‘Neptune's Horses’, 넵튠은 포세이돈의 신격이 로마로 넘어가 숭배될 때 붙여진 이름이다.
이 그림에서도 삼지창을 든 넵튠(포세이돈)이 수많은 말들과 함께 바다를 지배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우선 가장 유명한 일화로는 그리스의 도시인 ‘아테네’의 소유권을 두고 전쟁의 여신 아테나와 경쟁한 사건이 있다. 두 신이 서로 그 도시의 수호신이 되려고 다투다가, 결국은 그 도시 주민들의 의견을 들어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 결정 방법이란, 주민들에게 더 유용한 선물을 내리는 신을 그들 도시의 수호신으로 삼는 것이었다. 이 경쟁에서 아테나는 올리브 나무를, 포세이돈은 말을 주었는데, 이 중에서 올리브 나무가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주민들에 의해 도시의 수호신은 아테나로 정해지게 되었다. 비록 경쟁에서는 패했으나, 포세이돈은 말을 인간들에게 준 신으로서, 말의 조련자, 경마의 수호신 등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이 외에도 곡물과 수확의 여신 데메테르(Demeter, Δημήτηρ)와의 사이에서는 신마(神馬) 아리온을, 자신과 눈을 마주친 모든 생물을 돌로 만드는 힘을 가진 괴물로 유명한 메두사(Medusa, Μέδουσα)와의 사이에서는 천마(天馬) 페가수스를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어, 포세이돈과 말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이처럼 ‘말의 신’으로도 볼 수 있는 포세이돈이기에, 말처럼 소리를 지르는 발작을 일으키는 환자를 본 그리스 사람들은 그 증상이 포세이돈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이것이 신화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고대인들의 병리 기전을 설명하는 방식이었으며, 항뇌전증약물(antiepileptic drug, AED)과 같은 치료제도 없던 그 시절에는 질병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신에게 기도를 올리며 치유를 기원하였을 것이다. 비록 현대의 관점으로 볼 때는 아무런 의미 없는 진단과 치료 방식이었더라도, 증상에 대한 원인 설명과 그에 대한 대처 방법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노력들이 쌓여 이 시대의 의학적 진단과 치료법을 발견하는 원동력이 된 것일 수도 있다.